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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 (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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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수는 300년에 태어나, 성한의 장군으로 활약하며 건녕왕에 봉해졌다. 이웅 사후에는 이반을 보좌하며 정치를 돌보았고, 이기가 즉위하자 한왕으로 봉해졌다. 이기의 폭정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켜 이기를 폐위시키고 황제에 즉위, 국호를 한으로 고쳤다. 이웅의 후손들을 제거하고 동진을 공격했으나, 석호의 공포 정치를 모방하며 사치스러운 궁궐을 짓고 폭정을 펼쳐 성한의 국력을 약화시켰다. 343년에 사망하여 안창릉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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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 (성한)
기본 정보
이름이수 (李壽)
칭호황제
왕조성한
생애
출생영강 원년 (300년)
사망한흥 6년 (343년) 8월
아버지이양
통치
즉위338년
퇴위343년
연호한흥
가족
배우자염황후
칭호
시호소문황제 (昭文皇帝)
묘호중종 (中宗)
능묘안창릉 (安昌陵)
기타
로마자 표기Li Shou

2. 즉위 이전

이수는 이특의 동생 이양(李驤)의 아들로 300년에 태어났다. 이웅 치세에 장군으로 여러 전선에서 작전을 지휘하여 명망을 쌓았다. 333년 영주(寧州)를 평정하고 건녕왕(建寧王)에 봉해졌다. 334년 이웅이 병에 걸려 이수를 보좌역으로 임명했고, 이웅이 죽고 이반이 즉위하자 이반을 대신하여 정치를 돌보았다.

같은 해 10월, 이월(李越)·이기가 이반을 죽이고 이기를 즉위시키자 이수는 대도독 직위를 추가로 받고 한왕(漢王)으로 봉해졌다. 이시(李始)가 이수를 부추겨 모반을 꾸몄으나, 이수는 거절했다. 이시는 이수를 이기에게 거짓으로 참소했으나, 이기는 듣지 않고 이수에게 이오(李玝)를 토벌하게 했다. 이수가 이오를 설득하여 항복시키자 이수를 양주(梁州) 자사로 삼고 부(涪)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기가 폭정을 일삼자 이수는 살해될 것을 두려워하여 입조하지 않았다. 이수는 공장(龔壯)에게 계책을 물었고, 공장은 반정을 일으켜 이기를 몰아내고 동진(東晉)에 항복할 것을 권했다. 이수는 모반을 계획했으나, 이기가 눈치채고 이수의 동생 이유(李攸)를 살해했다. 이에 이수는 이기를 잡을 것을 명하는 밀조를 위조하여 부하들을 선동하고 거병하여 성도를 공격했다.(338년) 이기는 성도를 함락당하고 황궁에 유폐되었으며, 이수는 이기에게 이월 등을 죽일 것을 상신하여 세력을 약화시키고, 태후 임씨(任氏)의 명령을 빙자하여 이기를 폐위하였다.[3]

2. 1. 출생과 초기 생애

이수는 이특의 동생 이양(李驤)의 아들로 300년에 태어났다.[3]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젊은 시절부터 예절을 갖춰 다른 황족 자제들과는 달랐다고 한다. 이웅은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중책을 맡을 만한 인물이라 칭찬했다.

304년, 서진의 익주자사 나상이 군사를 보내 촉의 중부를 침공했을 때, 이수는 어머니 찬씨와 함께 사로잡혔으나 어떻게 풀려났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3]

2. 2. 이웅 치세의 활약

이웅의 치세에 이수는 장군으로 여러 전선에서 작전을 지휘하여 명망을 쌓았다.[3] 333년 서진의 영토인 녕주(寧州, 현재의 윈난성구이저우성)를 정복하여 건녕왕(建寧王)에 봉해졌다.[3]

이수는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예절을 잘 지켜 다른 황족 자제들과 구별되었다. 이웅은 그의 재능을 범상치 않게 여겨 중책을 맡을 만한 인물이라고 칭찬했다.

318년, 아버지 이상이 양주자사이봉의 반란을 평정하자, 이수는 전장군·도독파서제군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동장군으로 옮겼으며, 재야 선비 초수를 빈객으로 초빙하여 파서를 잘 다스려 위세와 은혜를 크게 떨쳤다.

323년, 이수는 이무와 함께 음평을 공격했지만, 구지의 양난적에게 저지당했다.

328년 겨울, 이상이 사망하자 이수는 대장군·서이교위에 임명되었다. 그 후 대도독·시중을 더하고 부풍공에 봉해졌다.

330년 10월, 이수는 정남장군 비흑과 정동장군 임사를 따라 파동을 공략하여 함락시키고, 동진의 파동군 태수양겸을 건평까지 몰아냈다. 이수는 비흑에게 별군을 주어 건평을 공격하게 하고, 동진의 파동감군 관구오를 의도까지 철수시켰다.

331년 7월, 음평·무도를 공격했지만, 양난적에게 저지당했다.

332년, 이수는 비흑과 소반을 선봉으로 주제를 공격하고, 진남장군 임회에게는 목락을 공격하게 했다. 333년 3월, 동진의 영주자사윤봉이 항복했고, 이수는 남중의 땅을 병탄했다. 이웅은 크게 기뻐했고, 이수는 건녕왕에 봉해졌다.

이수는 선비를 사랑하고 선행을 행했으며, 서적을 배우고 옛 장수와 재상의 사적을 암송할 수 있었다. 정벌에서 거듭 승리하여 국토를 천 리나 넓혔고, 성실하게 이웅을 섬겨 현명한 재상이라고 칭찬받았다.

334년 이웅이 병에 걸리자 이수는 보좌역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웅이 죽고 이반이 즉위하자 이반을 대신하여 정치를 돌보았다. 10월에 이월(李越)·이기(李期)가 이반을 죽이고 이기를 즉위시키자 이수는 대도독 직위를 추가로 부여받고 한왕(漢王)으로 봉해졌다.

2. 3. 이반·이기 치세

이반이기 치세 동안 이수는 여러 요직을 거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334년 이웅이 사망하고 이반이 즉위하자, 이수는 이웅의 칙령에 따라 하점(何點), 왕귀(王瓌)와 함께 정권을 장악한 핵심 관리 중 한 명이 되었다.[3] 이반이 이월과 이기에게 살해되고 이기가 즉위한 후에도 이수는 한왕(漢王)으로 봉해지며 권력을 유지했다.

이수는 이기의 사촌 이시의 모반 제안을 거절하고, 오히려 이기를 도와 이반의 형제 이무(李玝)를 동진(東晉)으로 도망치게 했다. 이후 이수는 양주(梁州) 자사로 임명되어 부성(涪城)에 주둔했다.

이기의 폭정과 의심이 심해지자 이수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은둔자 공장의 조언에 따라 반란을 계획했다. 338년, 이수는 이기가 자신을 체포하려 한다는 거짓 편지를 이용해 군사들을 선동하고 성도를 공격했다.

이수의 공격에 이기는 속수무책이었고, 이수의 태자 이세가 성문을 열어 이수를 맞이했다. 이수는 이기에게 이월 등 측근들을 처형하도록 강요하고, 임 태후의 칙령을 위조하여 이기를 폐위시켰다.

3. 치세

이수는 동진에 항복하자는 신하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자신의 봉국에 따라 '한(漢)'으로 고쳤다.[1] 이웅의 후손들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동진을 공격했다.[1] 후조(後趙)의 석호와 동진 협공을 계획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취소했다.[1] 그러나 후조에서 귀환한 신하들이 후조 수도 업(鄴)의 위엄과 화려함, 석호의 공포정치를 칭찬하자, 이수도 석호를 따라 성도에 사치스러운 궁궐을 짓고 공포정치를 시행했다.[1] 이로 인해 성한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간언하는 채흥·이억 등의 신하들도 살해당했다.[1]

343년에 병사하여 안창릉(安昌陵)에 매장되었다.[1]

3. 1. 즉위 초

이수는 동진에 항복하자는 신하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자신의 봉국에 따라 '한(漢)'으로 고쳤다.[1] 이웅의 후손들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동진을 공격했다.[1] 후조(後趙)의 석호와 동진 협공을 계획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취소했다.[1] 그러나 후조에서 귀환한 신하들이 후조 수도 업(鄴)의 위엄과 화려함, 석호의 공포정치를 칭찬하자, 이수도 석호를 따라 성도에 사치스러운 궁궐을 짓고 공포정치를 시행했다.[1] 이로 인해 성한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간언하는 채흥·이억 등의 신하들도 살해당했다.[1]

뤄와 지는 이수가 성도왕 칭호만 사용하고 진에 신하로 복종할 것을 제안했지만, 임조, 채흥, 이염, 장렬 등은 이수를 설득하여 황위에 오르게 했다.[2] 이수가 점을 쳐 "천자가 될 수 있는 것은 몇 년 동안일 뿐"이라는 점괘를 얻자, 임조는 "하루라도 충분한데, 몇 년 동안이나 천자로 있을 수 있다니"라며 기뻐했고, 해사명은 "몇 년 동안의 천자와 백 대에 걸친 제후 중 어느 쪽이 더 좋냐"고 간했다.[2] 이수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을 수도 있다. 임후의 말이 최선"이라고 답했다.[2]

황위에 오른 이수는 영내에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한흥으로 고쳤으며, 국호를 '대성'에서 '한'으로 변경했다.[2] 종묘를 재건하고 아버지 이상을 헌제로 추존하여 한시조묘에 장사 지냈으며, 이특, 이웅을 대성묘에 장사 지냈다.[2] 어머니 잠씨를 태후, 아내 염씨를 황후, 세자 이세를 태자로 삼았다.[2] 즉위 후 종묘를 다시 세우고, 아버지 이상에게 서를 내려 스스로를 기나 월과는 다른 종족이라 칭하며 제도를 개편했다.[2]

동교상국에, 나헌을 상서령, 고굉에, 해사명을 광한군태수, 모주에, 임조를 진북장군, 양주자사, 조아에, 이혁을 서이교위, 조아에, 마당을 고굉에, 이홍을 조아에, 종자 이권을 영주자사로 임명했다.[2] 굉장을 태사로 임명하고 안차와 속백(현인을 우대할 때 사용)을 준비하여 초빙했지만 굳이 사양하여, 호건과 소대를 준비하여 사우의 자리에 앉는 것을 허락했다.[2] 기존 공경과 주군의 장관을 모두 강등시키고 이수의 측근을 발탁했으며, 불우하여 승진하지 못했던 자들도 등용했다.[2] 성의 구신과 근친, 육군의 사민은 모두 좌천되었다.[2]

338년 5월, 이기가 자살하자 이수는 유공으로 시호를 올리고 왕후의 예로 매장했다.[2]

6월, 이혁의 사촌 형 이건이 이수에게 대신들의 모반을 고했다.[2] 7월, 이수는 아들 이광에게 명하여 전전에서 대신들과 맹약하게 하고, 이건을 한강군 태수로 옮겼다.[2]

8월, 폭풍우가 문을 흔들자 이수는 불길한 조짐을 의심했다.[2] 촉 땅에 장마가 계속되어 백성들이 기아와 역병에 시달리자, 이수는 군신들에게 충언을 명했다.[2] 굉장은 봉서를 올려 재앙의 원인이 동진 귀순 맹세를 깨고 자립한 데 있다고 말했고, 이수는 부끄러워하며 서장을 숨기고 공개하지 않았다.[2]

9월, 복사 임안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주살되었다.[2] 임안은 임황태후의 동생이었기에, 이수는 연좌를 통해 이웅의 아들들을 모두 처형했다.[2]

339년 9월, 이수는 병에 눕게 되었다.[2] 나헌과 해사명은 다시 동진 귀순을 건의했지만 이수는 듣지 않았다.[2] 이연 또한 월수군에서 상소를 올려 이수에게 제위를 물러나 왕을 칭할 것을 권했지만, 이수는 노하여 그를 살해했다.[2] 굉장과 해사명에게도 더 이상 이 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협박했다.[2]

이수는 항상 한 무제와 위 명제를 사모하고 아버지와 형의 업적을 부끄러워하여, 상소하는 자는 선대의 정치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2] 이수는 아버지와 형을 능가했다고 자부했고, 부모의 노고를 조롱하는 것은 소인의 행위라 여겼다.[2] 사인 두습은 시를 지어 간했지만, 이수는 "하고 싶은 말은 알겠지만, 흔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상대하지 않았다.[2] 굉장은 일곱 편의 시를 지어 왕거의 말을 이용하여 간했지만, 이수는 이해를 보였지만 상대하지 않았다.[2]

후조석호가 이수에게 서신을 보내 동진을 공략하여 천하를 나누자고 제안했다.[2] 이수는 기뻐하며 전함을 건조하고 병비를 정비하며 군량을 준비했다.[2] 산기상시 왕가와 중상시 왕광을 후조에 파견하여 석호에게 빙문하게 했다.[2] 상서령 마당을 육군도독으로 임명하여 가절을 주고 7만 명의 병사를 지휘하여 장강을 따라 진격하게 했다.[2] 군대가 성도를 지나갈 때 이수는 성루에서 구경했는데, 군신들은 "우리는 소국이고 사람도 적어 회계 땅은 멀리 떨어져 있어 도모할 시기가 아니다"라고 간언했고, 해사명도 간했다.[2] 이수는 군신들에게 이해관계를 말하게 했고, 굉장은 "폐하는 와 진 중 어느 쪽과 통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호는 승냥이와 이리의 종류에 지나지 않고, 진이 멸망하면 신종해야 하며, 천하를 다툰다 해도 힘의 차이는 역력합니다. 이 일을 잘 생각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자, 군신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간했다.[2] 결국 이수는 출병을 단념했고, 사중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2]

이수는 진동대장군 이혁을 파견하여 장가를 공략하게 했고, 장가군 태수 사서는 성을 굳게 지켰다.[2]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식량이 떨어지자 이혁은 철수했다.[2]

341년 12월, 이수는 태자 이세를 대장군, 녹상서사에 임명했다.[2]

즉위 초, 이수는 이웅을 본받아 관대한 정치를 꾀했고 검약을 미덕으로 삼았다.[2]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하는 일이 없어 촉 민심을 사로잡았다.[2] 하지만 이홍과 왕가가 업에서 귀환하자, 석호의 위세와 웅장한 궁궐, 업의 번화한 모습을 과장되게 이야기하고, 석호가 엄격한 형법으로 신하를 대하고 경내를 잘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전했다.[2] 이수는 이를 본받아 신하에게 작은 과실이 있어도 엄벌에 처하고 위엄을 세우려 했다.[2] 좌복야 채흥이 엄하게 간했지만, 이수는 비방하는 말이라며 주살했다.[2] 우복야 이억은 평소 직언했기에 이수는 불만을 품고 이유를 붙여 투옥하여 살해했다.[2] 업에 비해 도성과 교외가 충실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상방어부를 일으켜 주군의 공인을 소속시키고, 궁실을 크게 수축하여 물을 끌어들였다.[2] 집기류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가까운 군에서 장정을 징발하여 성도를 채우는 등 사치를 부렸다.[2] 태학을 넓히고, 연전을 일으켰다.[2] 많은 백성을 노역에 충당했기에 민중은 피폐해져 원망이 길에 넘쳐흘렀고, 열 명 중 아홉 명이 반란을 생각하는 지경이었다.[2]

3. 2. 후조와의 관계

이수는 동진에 항복하라는 신하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자신의 봉국에 따라 '한(漢)'으로 고쳤다.[1] 석호와 동진 협공을 계획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 후조에서 귀환한 신하들이 석호의 공포정치를 칭찬하자, 이수도 이를 모방하여 사치스러운 궁궐을 짓고 공포정치를 시행하여 국력을 약화시켰다.[1]

340년, 후조의 황제 석호는 이수에게 서신을 보내 동진에 대항하는 동맹을 제안했다. 이수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함대를 건조하고 식량을 비축했다. 임조는 성도에 방문하여 이수를 위해 상황을 분석했는데, 진이 멸망하면 이수는 후조의 압도적인 규모 때문에 후조에 복종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해 말, 이수는 석호에게 오만한 어조로 편지를 보내 석호의 심기를 크게 상하게 하여, 후조와의 동맹 가능성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수 초기 통치 기간 동안 그는 이웅의 관대한 통치 방식을 따랐지만, 이후 후조에 보낸 사신들이 석호가 가혹한 법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자, 이수는 자신의 방식을 훨씬 더 가혹하게 바꾸고, 석호를 모방하여 많은 건설 사업을 시작했다. 이는 석호가 백성들에게 부담을 준 것과 마찬가지로 성한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어, 그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크게 약화시켰다.

3. 3. 폭정과 국력 약화

이수는 동진에 항복하자는 신하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황제 자리에 올랐으며, 나라 이름을 자신의 봉국(封國)을 따라 '한(漢)'으로 바꾸었다. 또한 이웅의 후손들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동진을 공격하려 했다. 후조(後趙)의 석호와 함께 동진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중단했다. 그러나 후조에서 돌아온 신하들이 후조의 수도 업(鄴)이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칭찬하고, 석호가 공포정치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칭송하자, 이수도 석호를 본받아 성도에 화려한 궁궐을 짓고 공포정치를 시행했다.

이러한 행동은 성한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켰으며, 간언하는 채흥(蔡興)·이억(李嶷) 등의 신하들마저 살해당했다.

343년, 이수는 병으로 사망하였고, 안창릉(安昌陵)에 묻혔다.

즉위 초, 이수는 이웅의 정치를 본받아 관대하고 검소하게 나라를 다스리려 했고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 그러나 후조에 사신으로 갔다 온 이홍과 왕가가 석호의 위세와 웅장한 궁궐, 그리고 업의 번화한 모습을 과장되게 이야기하고, 석호가 엄격한 형벌로 신하를 대하고 경내를 잘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전하자, 이수는 이를 본받기 시작했다.[1]

이수는 신하에게 작은 잘못이 있어도 즉시 엄벌에 처하고 위엄을 세우려 했다. 좌복야 채흥이 엄하게 간했지만, 이수는 비방하는 말이라고 하여 죽였다. 우복야 이억은 평소에 직언을 했기에, 이수는 늘 불만을 품고 있었고, 이유를 붙여 가두고 살해했다. 또한 업에 비해 도성과 교외가 충실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궁궐을 크게 수리하고 물을 끌어들였다. 집기류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가까운 군에서 장정을 징발하여 성도를 채우는 등 사치를 부렸다. 또한 태학을 넓히고 연전을 일으켰다. 많은 백성을 노역에 동원했기에 백성들은 피폐해져 원망의 소리가 길에 넘쳐흘렀고, 열 명 중 아홉 명이 반란을 생각하는 지경이었다.[1]

3. 4. 최후

이수는 동진에 항복하라는 신하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황제 자리에 올랐으며, 나라 이름을 자신의 봉국을 따라 '한(漢)'으로 고쳤다.[1] 이웅의 후손들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동진을 공격했다.[1] 후조(後趙)의 석호와 함께 동진을 공격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중단했다.[1] 그러나 후조에서 돌아온 신하들이 후조의 수도 업(鄴)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칭찬하고, 석호가 공포정치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자랑하자, 이수도 석호를 본받아 성도에 화려한 궁궐을 짓고 공포정치를 시행했다.[1] 이로 인해 성한의 국력은 크게 약해졌고, 간언하는 채흥(蔡興)·이억(李嶷) 등의 신하들마저 살해당했다.[1]

343년에 병으로 사망하여 안창릉(安昌陵)에 묻혔다.[2]

4. 가계

항목내용
아버지李驤|이상중국어 (한나라 헌왕), 이웅의 삼촌, 헌황제로 추존[1]
어머니참씨 부인, 황태후로 추존[1]
배우자연황후 (338년 책봉)[1]
주요 후궁이비, 이봉(李鳳)의 딸, 시왕의 어머니[1]
자녀


참조

[1] 서적 Li Shou's biography in vol.121 of Jin Shu Jin Shu
[2] 서적 Zizhi Tongjian, vol.97. Emperor Kang's biography in Jin Shu Jin Shu
[3] 서적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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